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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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은 1989년 옴진리교 신도들이 옴진리교에 비판적인 활동을 하던 변호사 사카모토 쓰쓰미와 그의 가족을 살해한 사건이다. 사카모토 변호사는 옴진리교의 반사회성을 비판하고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여 언론과 협력했으나, 옴진리교는 이에 대응하여 마이니치 신문사 폭파를 계획하기도 했다. 옴진리교 간부들은 아사하라 쇼코의 지시로 사카모토 변호사 자택에 침입하여 일가족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 사건은 옴진리교 신도들의 자백과 시신 발견으로 진상이 밝혀졌으며, 관련자들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사이비 종교의 문제, 언론의 역할과 책임, 국가기관의 공정성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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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사카모토 가족 살해 사건 |
발생 위치 | 가나가와현요코하마시이소고구요코다이 3-35-7 산코포 하기와라 C 201호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자택) |
날짜 | 1989년 11월 3일 - 11월 4일 |
시간 | 오전 3시 7분 ~ 오전 3시 20분 (추정) |
유형 | 대량 살인, 가택 침입 |
목표 | 사카모토 가족 (3명) |
사망자 | 3명 |
가해자 | 아사하라 쇼코가 이끄는 옴진리교 신도들: 오카자키 가즈아키, 무라이 히데오, 니이미 도모미쓰, 하야카와 기요히데, 나카가와 도모마사, 하즈모토 사토루 |
사용 무기 | 망치, 염화칼륨 주사기 |
동기 | 교단을 비판하는 변호사 살해, 사카모토 쓰쓰미의 옴진리교 소송 제기 방지 |
피해자 정보 | |
이름 | 사카모토 쓰쓰미 |
출생일 | 1956년 4월 6일 |
사망일 | 1989년 11월 5일 (향년 33세) |
직업 | 변호사 |
사망 원인 | 질식사 |
시신 발견 | 1995년 3월 |
배우자 | 사카모토 사토코 |
자녀 | 사카모토 다쓰히코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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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의 배경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는 1989년 5월부터 옴진리교의 반사회성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출신으로, 요코스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1] 198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법원 서기로 일하다가, 1987년부터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2]
사카모토 변호사는 통일교를 상대로 한 집단 소송에서 승소한 경험을 바탕으로, 옴진리교 신자들이 기만과 위협에 의해 억류되어 있으며, 영적 판매와 같은 부당한 방식으로 재산을 빼앗기고 있다고 판단했다.[3] 그는 이러한 옴진리교의 행태에 맞서 피해자들을 돕고자 했다.
2. 1. 옴진리교 피해자 모임 결성
1989년 5월,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는 옴진리교 탈퇴 신도들의 상담을 계기로 옴진리교의 반사회적 행태를 고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옴진리교 피해 대책 변호단"을 결성하여 집단 소송을 준비했고, 이는 후에 "옴진리교 피해자 모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단체는 옴진리교의 영적 판매와 같은 불법 행위로 인한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옴진리교의 종교법인 인가 취소 등을 위한 민사소송을 준비했다.[3]2. 2. 언론과의 협력
사카모토 츠츠미 변호사는 에가와 쇼코의 소개로[28], 출가 신자의 어머니로부터 아들의 옴진리교 탈퇴에 대한 상담을 받은 것을 계기로 1989년 5월부터 옴진리교의 반사회성을 비판·추궁하며 '옴진리교 피해자 모임'을 조직했다. 같은 해 9월, 『선데이 매일』에서 '옴진리교의 광기' 특집이 시작되어 옴진리교 비판이 거세지는 가운데, 사카모토 변호사도 취재를 받게 되었다.[29]옴진리교는 『선데이 매일』의 출판을 중지시키기 위해 출판사인 마이니치 신문사 본사 폭파 계획을 세웠다. 2톤 트럭에 폭탄을 탑재하여 팔레스 사이드 빌딩 지하층에 돌진, 폭발시켜 선데이 매일의 출판을 중지시킬 계획이었다. 폭탄은 무라이 히데오가 만들 예정이었다.[30] 그러나 트럭이 지하에 들어갈 수 없는 점, 선데이 매일이 팔레스 사이드 빌딩 지하층의 윤전기로 인쇄되는지 불분명한 점 때문에 계획은 난관에 부딪혔다.
대안으로 직접 폭탄을 설치하는 계획이 있었지만, 하야카와 키요히데가 옴진리교 전단을 지요다구 히토츠바시의 마이니치 신문사에 놓고 와 증거를 남기게 되어 좌절되었다.[31]
2. 3. 옴진리교의 대응
1989년 10월 26일, 옴진리교 간부인 우에스기 후미히로, 아오야마 요시노부, 하야카와 기요히데는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인터뷰를 촬영한 TBS에 항의하여 방송을 중지시켰다(『3시에 만나요』의 TBS 비디오 문제). 이 인터뷰에서 사카모토 변호사는 옴진리교의 종교를 이용한 사기 행각을 비판하고,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초능력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32]같은 해 10월 31일, 옴진리교 간부들은 요코하마시에 있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법률 사무소에서 소송 회피를 위한 협상을 시도했지만, 사카모토 변호사는 옴진리교의 사기 행각을 지적하며 소송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불행하게 할 자유는 없다"고 말하며 옴진리교 측의 주장을 반박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33][34]
이후 옴진리교는 아사하라 쇼코의 지시에 따라 사카모토 변호사의 살해를 모의하게 된다. 아사하라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활동은 진리당 출마를 예정하고 있는 다음 해(1990년)의 중의원 의원 총선거나 향후 교단의 발전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29] 그는 "자신(아사하라)에 대한 비방 중상은 괜찮지만, 진리에 대한 방해는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사카모토 변호사가 악업을 쌓기 전에 포아했다"고 진술했다.[42]
3. 살해 결정과 실행
1989년 11월 초, 아사하라 쇼코는 옴진리교 간부들에게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를 지시했다. 11월 3일, 무라이 히데오, 하야카와 기요히데, 오카자키 가즈아키, 니이미 도모미쓰, 하시모토 사토루, 나카가와 도모마사는 사카모토 변호사가 출퇴근 시 이용하는 요코하마시 요코다이역 부근에서 잠복, 납치 후 염화칼륨을 주사해 살해하려 했으나, 이날은 공휴일(문화의 날)이라 실패했다.[46]
계획을 변경하여 11월 5일 새벽 3시경, 이들은 사카모토 변호사의 자택에 침입했다. 하시모토가 사카모토 쓰쓰미를 덮치고 오카자키가 목을 졸랐으며, 니이미는 사카모토의 아내(당시 29세)를, 나카가와는 사카모토의 장남(당시 1세)의 입을 막아 질식사시켰다.
3. 1. 살해 지시
아사하라 쇼코는 옴진리교 간부인 무라이 히데오, 하야카와 기요히데, 오카자키 가즈아키, 니이미 도모미쓰, 나카가와 도모마사를 제1 사티안에 모아, "포아"(옴진리교에서 살해를 의미하는 은어) 사인을 하며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를 염화칼륨으로 살해하라고 지시했다.[48] 이는 1989년 11월 2일 또는 3일경의 일이다.아사하라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활동은 진리당이 출마를 예정하고 있는 다음 해(1990년)의 중의원 의원 총선거나 향후 교단의 발전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29] 그는 검찰관 면전 조서에서 "자신(아사하라)에 대한 비방 중상은 괜찮지만, 진리에 대한 방해는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사카모토 변호사가 악업을 쌓기 전에 포아했다"고 말했다.[42]
당초에는 『선데이 매일』의 편집장 마키 타로를 살해할 계획이었으나, 귀가 시간을 알 수 없어 습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산되었다. 그러자 아사하라는 갑자기 표적을 사카모토 변호사로 변경했다.[36]
1989년 11월 3일, 실행범들은 사카모토 변호사가 출퇴근 시 이용하는 요코하마시 요코다이역 부근에서 잠복했지만, 그 날이 공휴일 (문화의 날)이었기 때문에 사카모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행은 사카모토 변호사의 자택으로 향했다.[46]
사카모토의 집 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하야카와는 아사하라에게 전화로 연락했고, 아사하라는 "흐음, 그런가. 그럼 들어가면 되지 않겠는가." "(가족을 휘말리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함께 할 수밖에 없겠지."라며 일가족 전원의 살해를 명령했다.[29][48] 아사하라는 이 때의 심경을 "나는 순간, 아이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나도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고생했고, 아이만 남겨두는 것은 오히려 잔혹하다고 생각해서 살해를 허가했다"고 말했다.[49]
3. 2. 실행 계획
1989년 11월 3일, 옴진리교 간부인 무라이 히데오, 하야카와 기요히데, 오카자키 가즈아키, 니이미 도모미쓰, 하시모토 사토루, 나카가와 도모마사는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를 납치하여 염화칼륨을 주사해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7] 이들은 사카모토 변호사가 출퇴근 시 이용하는 요코하마시 요코다이역 부근에서 잠복했으나, 이날은 공휴일(문화의 날)이었기 때문에 사카모토 변호사는 나타나지 않았다.[46]계획을 변경하여, 이들은 11월 4일 새벽 3시경 사카모토 변호사의 자택에 침입했다. 이들은 자고 있던 사카모토 일가족을 발견하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염화칼륨 주사에 실패하고 모두 질식사시켰다.[29][50][51]
3. 3. 살해 과정
1989년 11월 5일 새벽, 옴진리교 간부들은 아사하라 쇼코(마쓰모토 지즈오)의 지시에 따라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집에 침입했다. 하시모토 사토루가 사카모토 쓰쓰미에게 올라타고 오카자키 가즈아키가 목을 졸라 살해했으며, 니이미 도모미쓰가 사카모토의 아내(당시 29세)를 목 졸라 살해했다. 나카가와 도모마사가 사카모토의 장남(당시 1세)의 입을 막아 살해했다.[29][50][51]당초 계획은 11월 3일, 사카모토 변호사가 출퇴근 시 이용하는 요코하마시의 요코다이역 부근에서 자동차로 납치한 후 염화칼륨을 주사해 살해하고 시신을 방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카모토 변호사는 이 날이 공휴일 (문화의 날) 이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옴진리교는 계획을 변경하여 11월 5일 새벽, 사카모토 변호사의 자택에 침입했다. 범행 당시, 저항이 심하여 염화 칼륨을 제대로 주사하지 못하고, 일가족 전원을 질식사 시켰다.[29][50][51] 사카모토 쓰쓰미는 범인들에게 "돈이라면 줄게"라고 말하며 저항했고,[52] 근육 주사로 염화칼륨을 주사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결국 질식사했다.[53] 사카모토 쓰쓰미의 아내는 "아이들만은"이라며 목숨을 구걸하고, 무라이 히데오의 손가락을 깨무는 등 저항했지만, 역시 질식사했다.[53] 14개월 된 장남은 울음을 터뜨려, 나카가와와 니이미에게 코와 입을 막혀 질식사했다.[54]
4. 시신 유기와 은폐
옴진리교 간부들은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족의 시신을 각각 다른 현에 유기하여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시신은 니가타현 나다치마치(현재의 조에쓰시) 산속에, 아내는 도야마현 우오즈시 베츠마타의 베츠마타소가타케선(別又僧ヶ岳線일본어) 옆 산길에, 장남은 나가노현 오마치시 히나타야마 산속에 묻었다.[108][109][110]
시신 유기 과정은 매우 엉망이었는데, 무라이 히데오는 치아 형태를 통해 신원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곡괭이로 사카모토 변호사의 치아를 내리치자고 제안했다. 오카자키 가즈아키, 무라이, 니이미 도모미쓰는 곡괭이나 돌로 사카모토 변호사의 얼굴을 부수려고 했다.[9] 또한 유기 현장에서는 하야카와 기요히데가 사온 붉은 대게 껍질과 함께 쓰레기처럼 매장되었다.[56][57][58]
4. 1. 시신 유기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시신은 니가타현나다치마치(현재의 조에쓰시) 산속에, 아내의 시신은 도야마현 우오즈시 베츠마타의 베츠마타소가타케선(別又僧ヶ岳線일본어) 옆 산길에, 장남은 나가노현 오마치시 히나타야마 산속에 각각 묻혔다.[108][109][110]옴진리교는 시신 발견 시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하기 위해 사카모토 변호사의 치아를 곡괭이로 내리치거나, 오카자키 가즈아키·무라이 히데오·니이미 도모미쓰는 곡괭이나 돌로 사카모토 변호사의 얼굴을 부쉈다.[9] 유기 현장인 니가타에서는 하야카와 기요히데가 사온 붉은 대게 껍질과 함께 쓰레기처럼 매장되었다.[56][57][58]
4. 2. 은폐 시도
옴진리교는 사건 현장에 간부만 소지할 수 있는 '플레쟈'(プルシャ일본어)라는 배지를 떨어뜨려 자신들의 소행임을 드러냈다.[46] 그러나 옴진리교 측은 "플레쟈 뱃지는 대량 생산하고 있으므로 모른다"는 답변을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에 보내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사건 후, 아사하라 쇼코는 나카가와가 현장에 풀샤를 떨어뜨린 것을 질책했다.[22] 또한, 장갑을 끼지 않아 지문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는 하야카와, 무라이에게 후지 본부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아사하라는 돌아온 일행에게 "세 사람을 죽이면 사형은 확실하다. 모두 공범이다. 사형이군"이라고 웃으며 말했다.[23]
5. 사건 이후
1989년 11월 21일, 사카모토 일가가 실종된 직후 변호사 유지 단체인 '사카모토 변호사와 가족을 구하는 전국 변호사의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1995년 9월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일본 전국 규모로 광고지를 배포하고 캐러밴 활동을 전개하며 사카모토 일가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5년 9월 6일 도야마현 우오즈시 베츠마타의 베츠마타소가타케선(別又僧ヶ岳線일본어) 옆 산길에서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의 아내 미야코 씨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발견 장소에는 유족이 나무로 만든 위령비를 세우고 위령 등산도 행하고 있다.[108][109][110] 사카모토 변호사의 시신은 니가타현 나다치마치(현재의 조에쓰시)의 산 속에, 장남은 9월 10일 나가노현 오마치시의 히나타야마 산속에서 발견되었다. 일가족의 묘소는 가마쿠라에 있는 엔가쿠지의 송령원(松嶺院)에 있다.
야마구치구미 재일한국인 조직원에게 살해당한 무라이 히데오를 제외한 범인 5명 전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살해 당시, 나카가와가 풀루샤(옴진리교의 배지)를 방에 떨어뜨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옴진리교의 소행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29]
5. 1. 초동 수사 문제
실종 초기 사카모토 변호사가 소속되었던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 등 관계자들은 옴진리교의 연루를 지적했지만, 가나가와현 경찰은 사건과의 관계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111] 이는 요코하마 법률사무소가 노동문제(국철 요코하마 지부 탄압 사건에서 현 경찰이 오인 체포함)나 일본 공산당 간부 집 도청 사건에서 경찰 측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 변호사들의 호소에 대해 필요 이상의 신중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남아있다 (특히 요코하마 국철 노조 사건은 사카모토 변호사가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66]에가와 쇼코에 따르면, 가나가와현 경찰 간부는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 말대로 납치다, 납치다 하고 있으면 나중에 창피를 당할 것이다",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 변호사들이 언론에 마구 떠들어대서 곤란하다" 등이라고 말했다.[67] 또한 유족의 집에 와서 책장의 책 제목을 기록하고 사상 조사를 했다.[68]
때문에 기자 클럽에서, 가나가와현 경찰은 "사카모토는 빚을 져서 실종되었다", "(일로 얻은) 큰 돈을 가지고 도망갔다", "(학생 시절부터 관계가 있던) 공산주의 과격파의 내분에 휘말렸다"[69] 등의 근거 없는 소문을 신문사에 흘렸다. 게다가, 그와 동시에 가나가와현 경찰은 "임의 실종의 가능성은 반반이다"라고 유출했다.[70]
옴진리교도 이에 편승하여 "노동 운동 등이 관계되어 있다", "범행 현장에 일부러 푸르샤를 떨어뜨리는 것은 명백히 부자연스럽고 모략이다"라고 주장했다.[71]
1990년 2월에는 가나가와 현 경찰에게 "장남은 나가노현 오마치 시의 히나타야마 산 속에 묻혀있다"라는 내용의 편지와 묻혀있는 장소가 나타나있는 손으로 그려진 지도가 들어있는 봉서가 누군가에 의해 왔고,[112] 가나가와 현 경찰은 나가노현 경찰과 같이 지도에 표시된 장소를 수색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113] 결국 '재수색'은 1995년 9월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의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114]
이러한 가나가와현 경찰의 미숙함은 옴진리교의 폭주를 증장시키는 결과가 되어, 마쓰모토 사린 사건이나 지하철 사린 사건 등 많은 옴진리교 사건이 발생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사건 당시에 요코하마 지방 검찰청 검사장이었던 사토 미치오는 "이 비판은 빗나갔다"며, 현 경찰은 옴진리교의 연루는 틀림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고, 사건의 성질상 수사의 방향이나 진척 상황을 밝힐 수는 없었다고 했다.[72] 상대가 종교 단체였기 때문에, 수사상 큰 장애가 되었다.[73]
전 도쿄 지방 검찰청 특별 수사부장인 가와카미 가즈오와 가나가와현 경찰은 폭력단의 고토구미의 범행으로 보았다.[74]
5. 2. TBS 비디오 문제
1989년 10월 26일, 도쿄 방송(TBS)의 와이드 쇼 "3시에 만납시다" 프로그램은 옴진리교 문제에 대해 사카모토 쓰쓰미와 인터뷰를 했지만, 옴진리교 간부들이 TBS 과학기술관에 항의하여 방송이 중지되었다. TBS는 옴진리교 간부에게 인터뷰 영상을 보여주었고, 11월 5일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 TBS는 저널리즘의 원칙인 취재원 익명성을 어기고 사건의 계기를 만들었으며, 실종 후에도 경찰이나 변호사협회에 알리지 않고 옴진리교를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02]5. 2. 1. 언론 윤리 위반
1989년 10월 26일, 도쿄 방송(TBS)의 와이드 쇼 "3시에 만납시다" 프로그램은 옴진리교 문제에 대해 사카모토 쓰쓰미와 인터뷰를 했지만, 옴진리교 간부들이 TBS에 항의하여 방송이 중지되었다. TBS는 옴진리교 간부에게 인터뷰 영상을 방송 직전에 보여주었고, 11월 5일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102] 이로 인해 TBS는 취재원 보호 원칙을 어기고 사건의 계기를 만들었으며, 실종 후에도 경찰이나 변호사협회에 알리지 않고 옴진리교를 감쌌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영향으로, 『3시에 만납시다』의 후속 프로그램인 『슈퍼 와이드』 방송이 중단되었다.5. 2. 2. 옴진리교와의 유착 의혹
1989년 10월 26일, 도쿄 방송(TBS)의 와이드 쇼 "3시에 만납시다" 프로그램은 당시 사회 문제로 떠오르던 옴진리교 문제에 대해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 정보를 입수한 옴진리교 간부들이 TBS를 방문하여 항의했고, 결국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방송은 중지되었다.[102]더욱이 TBS는 옴진리교 간부들에게 인터뷰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이는 취재원 보호라는 저널리즘의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5][6] 며칠 뒤인 11월 5일,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
TBS는 사건 발생 후에도 옴진리교에 인터뷰 영상을 보여준 사실을 경찰이나 변호사협회에 알리지 않고, 옴진리교를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102] 이러한 TBS의 행동은 언론과 특정 종교 단체 간의 유착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5. 3. 유명 문화인들의 옴진리교 옹호
일부 저명한 문화인들이 옴진리교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다.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주간 SPA!』 1989년 12월 6일 호에서 아사하라 쇼코와의 대담을 통해 옴진리교를 옹호했다.[75][76][77] 그는 "광기가 없다면 종교가 아니다"라며 옴진리교 교주가 모든 것을 고발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에 대해 옴진리교와 아사하라 쇼코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나카자와는 『주간 포스트』 1989년 12월 8일 호 "옴진리교의 무엇이 나쁜가"에서도 아사하라를 "높은 의식 상태를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옴진리교를 옹호했다.[75][76]
"사카모토 변호사와 가족을 구하는 전국 변호사의 회"는 나카자와의 옹호 발언이 "옴진리교는 잘못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고, 옴진리교에 대한 의혹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75] 또한, 이 기사를 읽고 옴진리교에 입신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75]
나카자와 외에도 시마다 히로미, 요시모토 타카아키, 아라마타 히로시, 쿠리모토 신이치로, 비토 타케시, 이케다 아키라 등도 옴진리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했다.[75]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5. 4. 진상 규명과 재판
1995년 봄, 실행범 중 한 명인 오카자키 가즈아키가 자백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한 3월 20일, 경찰은 옴진리교에 대한 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오카자키는 4월 6일에 진상을 이야기했고[85][86], 그의 자백으로 사카모토 일가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같은 해 9월 6일 경찰의 산중 수색으로 당일 사카모토와 그의 아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아내의 시신은 시랍화되어 있었다[87]. 장남의 시신 수색은 난항을 겪었지만, 4일 뒤인 9월 10일에 발견되었다[88].피살된 무라이 히데오를 제외한 실행범 전원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1998년 10월 23일 오카자키 가즈아키 1심 사형 판결, 2000년 7월 28일 하야카와 기요히데 1심 사형 판결 등 재판이 진행되었다.[16][17][18][19][20]
2017년, 나카가와는 감옥에서 자신의 옴진리교 신념을 버리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사과하며, 옴진리교 지도자 아사하라 쇼코를 "범죄자"라고 언급하는 회고록을 출판했다.[21]
실행범들의 사형은 2018년 7월 6일과 7월 26일 두 차례에 걸쳐 집행되었다.
6.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 피해자 유족의 불만: 피해자 유족들은 "피해자가 잠금장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라는 결론에 불만을 표하며, "진짜 기일을 알고 싶다"는 목소리를 냈다.[103] 이는 범죄 피해자 유족들의 아픔과 진실 규명 요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 음모론 제기: 하야카와 변호인 측은 "오카자키 카즈아키가 정찰을 갔을 때 (사카모토의 자택을) 열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며, "교단 밖의 협력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을 제기했다.[104][105] 이는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의혹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 옴진리교의 책임 회피 시도: 1994년경, 택시 운전사를 자칭하는 자가 마르코폴로 편집부에 나타나 사카모토 일가와 비슷한 손님이 라이트 밴을 타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진위 여부는 불명). 옴진리교는 이를 모략설의 근거로 삼았다.[71]
- 아사하라 쇼코의 태도: 사건 당일 아사하라는 "다이너마이트를 써서 날려버리고 가면 돼"라는 내용의 설법을 했고,[106] 사건 발생 후 실행범과 이시이 히사코를 모아 살인죄 항목을 낭독하게 하고 히죽거렸다.[39] 또한 1991년 여름에는 아오야마 요시노부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도 했다.[107] 이는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반인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황들은 옴진리교 사건이 단순한 범죄 사건을 넘어, 한국 사회에 종교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언론의 역할, 국가기관의 공정성 등 여러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6. 1. 사이비 종교 문제
이 사건은 옴진리교라는 사이비 종교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 행위로, 종교의 자유가 무한정 허용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특히 옴진리교는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 외에도 타키모토 타로 변호사 사린 습격 사건에서처럼 사린, VX, 보툴리누스균을 이용한 암살을 시도하는 등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위를 자행했다.[107]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사건을 통해 종교의 자유도 사회적 책임을 동반해야 하며, 반사회적 행위를 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도 사이비 종교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6. 2. 언론의 역할과 책임
1989년 10월 26일, 도쿄 방송(TBS)의 와이드 쇼 프로그램 "3시에 만납시다"는 옴진리교 문제에 대해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와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옴진리교 간부들이 항의하자 TBS는 인터뷰 방송을 중지했다. 심지어 TBS는 옴진리교 간부들에게 인터뷰 비디오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같은 해 11월 5일, 사카모토 쓰쓰미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102]TBS는 취재원의 익명성을 보장해야 하는 저널리즘의 원칙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사건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사건 이후에도 옴진리교에게 인터뷰 비디오를 보여준 사실을 경찰이나 변호사협회에 알리지 않고 옴진리교를 감쌌다는 비판도 받았다.[102]
6. 3. 국가기관의 공정성
실종 초기, 사카모토 변호사가 소속된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 등 관계자들은 옴진리교의 관여를 지적했지만, 가나가와현 경찰은 사건과의 관계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는 노동문제(국철 요코하마 지부 탄압 사건, 일본 공산당 간부 집 도청 사건) 등에서 경찰 측과 대립했기 때문에,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 변호사들의 주장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신중한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11] 특히 국철 요코하마 지부 탄압 사건은 사카모토 변호사가 주로 담당했기 때문에, 반공주의적인 의식에서 사카모토 변호사를 좋게 생각하지 않아 수사가 미흡했다는 비판도 있었다.[66]에가와 쇼코에 따르면, 가나가와현 경찰 간부는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 말대로 납치라고 하면 나중에 창피를 당할 것이다", "요코하마 법률 사무소 변호사들이 언론에 떠들어대서 곤란하다" 등의 발언을 했다.[67] 또한 유족의 집에 방문하여 책장의 책 제목을 기록하는 등 사상 조사를 하기도 했다.[68]
가나가와현 경찰은 기자 클럽에서 "사카모토는 빚 때문에 실종되었다", "(일로 얻은) 큰 돈을 가지고 도망갔다", "(공산주의 과격파의 내분에 휘말렸다" 등의 근거 없는 소문을 신문사에 흘렸다.[69] 게다가 "임의 실종의 가능성은 반반이다"라고 언론에 슬쩍 흘려 여론을 호도했다.[70]
1990년 2월에는 가나가와현 경찰에 "장남은 나가노현 오마치시 히나타야마 산 속에 묻혀있다"는 내용의 편지와 지도가 도착했지만,[112] 가나가와현 경찰은 나가노현 경찰과 함께 수색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113] 결국 재수색은 1995년 9월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의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114]
옴진리교는 "노동 운동 등이 관계되어 있다", "범행 현장에 일부러 푸르샤를 떨어뜨리는 것은 명백히 부자연스럽고 모략이다"라고 주장하며 가나가와현 경찰의 미숙한 대응에 편승했다.[71] 이는 마쓰모토 사린 사건, 지하철 사린 사건 등 옴진리교의 다른 범죄를 방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건 당시 요코하마 지방 검찰청 검사장이었던 사토 미치오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빗나갔다"고 반박하며, 현 경찰은 옴진리교의 연루를 확신하고 있었고, 사건의 성질상 수사 상황을 밝힐 수 없었으며, 그 시점에서는 가택 수색도 무리였다고 주장했다.[72] 그는 종교 단체라는 특성 때문에 수사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덧붙였다.[73]
1998년10월 23일 오카자키 카즈아키 1심 사형 판결, 2000년7월 28일 하야카와 키요히데 1심 사형 판결 등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가나가와현 경찰의 부실함은 간과되었다. 2004년2월 27일 아사하라 쇼코의 사형 판결 직전, 사카모토의 아내의 아버지인 오야마 토모유키는 "행방불명 이후의 대응으로 볼 때, 가나가와현 경찰의 수사는 신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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